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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 아동 정책정조는 아이들에 대한 정책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심지어 엎드려 절까지 했다고 한다. 정유역변1777년(정조 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괴한이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홍술해, 홍상범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며, 홍계능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하였던 세력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을 뿐 모두 .. 2024. 3. 5.
영조 (3) 고류의 실패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도세자는 경종비 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 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됩니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 씨와 후궁 숙의 문 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됩니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 2024. 3. 5.
영조 (2) 세자의 대리청정과 갈등 1750년(영조 26년) 혜경궁 홍 씨가 경복궁에서 이정을 출산하자 영조는 의소세손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얼마 뒤 원손에 임명하고, 바로 세손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손은 1752년 4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통명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751년 11월에는 장자 효장세자 사후 홀로 있던 효순현빈도 사망하였습니다. 싹싹했던 맏며느리가 일찍 과부가 된 것을 영조는 안타까워했는데 이 둘의 연이은 죽음으로 영조는 한동안 상심하였습니다.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손자 이산이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영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사도세자에게 시험 삼아 명을 내려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습니다... 2024. 3. 5.
영조 (1) 영조1724년(영조 즉위년)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습니다.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소론의 김일경 와 목호룡을 처형하였습니다.즉위 직후부터 영조는 자신의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경종 독살설'과,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노론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악성 루머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습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하였지만, 노론의 독주를 염려하여 소론의 일부를 중용하게 됩니다.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전부 역적으로 처형하자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을 묵살하였습니다. 그러다 1727년(영조 3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 202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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