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먼저, 요점만 얘기하자면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보복과 연산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연산군이 일으킨 대규모 숙청 사건입니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성종 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대부분 숙청당했습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중종 반정 직후 대부분 복권됩니다.
· 배경과 원인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폐출되었다가 1482년에 사사되었습니다. 연산군이 공표한 갑자사화를 벌인이유는 이때 윤 씨의 폐비를 찬성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복수를 위해서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중종때 사관들은 임사홍이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의논하여 연산군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로 합의하고 임사홍이 폐비 윤 씨와 관련된 사실을 연산군에게 보고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관의 평 말고는 연산군이 임사홍과 사적으로 만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일절 없으며 무엇보다 윤씨 사건을 보고했다는 임사홍은 정작 이극균과의 친분이 발각되어 유자광과 같이 갑자사화 때 죽을 뻔한 사람이라는 점 등 객관적으로 봐서 중종 때 사관의 추측을 믿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외할머니에게 어머니의 피묻은 적삼을 보고 복수를 시작했다는 야사도 갑자사화 한참 전인 연산군 직위 직후부터 외할머니 신 씨에게 매년 곡식을 베풀어 주는 등 이미 오래전부터 외할머니와 교류하고 있었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폐비 윤씨의 죽음이 갑자사화의 계기 및 명분은 될지언정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왕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가 기회가 와서 사화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기에 연산군의 어머니가 사사된 것이 원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연산군의 이세좌에 대한 처벌은 갑자사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처벌 과정은 왕권을 제약하는 대간과 자신의 절대왕권 구축에 걸림돌이 되는 훈구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 과정이었습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이후에도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그다지 수그러들지 않은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숙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연산 9년 9월 연산군은 이세좌가 실수로 자신의 옷에 술을 엎지른 것을 핑계로 '위를 능멸하는 풍습' 운운하며 이세좌를 유배를 보냈습니다. 다음해인 연산 10년 2월 연산군의 간택령에 홍귀달이 불응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연산군은 '대간들이 간하지 않는 것은 이세좌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홍귀달의 언사가 불공하고 임금을 경시하는 태도 역시 이세좌의 행위를 본받았기 때문이다'라며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세좌도 홍귀달과 같이 유배를 보냈습니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장본인 이세좌는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척결하는 데에도 폐비 윤 씨에 대한 복수를 하는 데에도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즉, 갑자사화로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행함과 동시에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한 것입니다.
· 경과
윤필상의 귀양
1504년(연산군 10년)에 폐비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윤 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추죄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4월 19일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했으며, 사약을 받았으나 사약을 마셔도 목숨이 끊기지 않자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향년 77세였습니다.
2. 창경궁의 피바람
연산군 10년(1504년) 음력 3월 20일 밤, 창경궁 뜰에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이자 낮에 잡아들인 이향과 이봉의 어머니인 귀인 정금이와 다른 후궁인 엄귀인을 결박하고 직접 구타를 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낮에 잡아들인 이향과 이봉을 창경궁의 뜰로 잡아와 후궁 두사람을 구타하도록 명령합니다. 이향은 너무 어두워 결박당한 두사람을 모르고 명령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봉은 두 사람중 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 정 씨인 것을 알고 장을 대지 못하자 연산군은 분노하며 사람을 시켜 귀인 엄 씨와 정 씨를 죽여버리게 됩니다. 모르고 어머니를 때린 이항에게 연산군은 다음날 말 한 마리를 선물로 내렸는데 조롱할 목적으로 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연산군은 어머니가 폐비된 뒤 왕비가 된 자순대비 윤씨의 거소 앞에서 칼을 들고 자순대비에게 거소 밖으로 나오라고 협박합니다. 자순대비의 하인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고 자순대비도 공포에 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연산군의 왕비 신 씨가 연산군을 간절히 말려 연산군은 돌아가게 됩니다
어머니 자순대비에게 횡포를 부린 직후 이번에는 할머니 인수대비의 거소에 처들어갑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거소에 쳐들어가 잡아왔던 이향과 이봉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할머니의 침실에 쳐들어갑니다.. 이후 이항을 시켜 억지로 인수대비에게 술을 올린 뒤, 인수대비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 씨를 왜 죽였다며 따지며 여러 불손한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3경(새벽 12시경) 잡혀온 이향과 이봉이 풀려나면서 음력 3월 20일 밤의 피바람은 끝이 나게 됩니다.
3. 대숙청
갑자사화로 인해 윤필상, 이극균, 이세좌를 비롯하여 여러 신하들이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사화는 점점 확대되어 나중에는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한 신하들까지 처형당했습니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행위를 꾸짖다가 화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윤씨를 왕비로 추숭 하여 성종묘에 배사를 하고자 할 때 반대한, 응교 권달수는 처형되었고, 이행은 귀양을 갔습니다.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려 할 때 찬성했던 윤필상, 김굉필, 성준, 이극균, 이세좌, 권주, 이주 등 10여 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여창, 한치형,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은 부관참시에 처했으며, 그 제자와 가족들도 처벌하였습니다. 송흠, 이파, 윤필상, 이세좌는 시체가 능지 되어 사방에 돌려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극균은 머리가 백관이 모두 보게 한 뒤 팔도에 돌려졌으며, 이극균의 서자인 이연명은 '그 아비로 하여 자리 잡은 세력을 믿고 무사를 많이 모아 군상에게 오만한 죄'로 참수되었습니다. 이세좌는 머리와 사지가 능지 된 뒤 머리에 찌가 달려 저잣거리에 매달렸습니다. 이미 죽은 한명회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저잣거리에 효시되었습니다. 윤필상은 시체를 태워 뼈를 부수어서 바람에 날리게 하였으니 쇄골표풍이라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한치형, 이파, 송흠, 윤채 등 여러 사람의 뼈가 부수어져 바람에 날려졌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죄인을 벌하고 형장을 가할 때 옆에서 보며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한편, 세자 시절 갈등을 빚기도 했던 문신이자 그의 스승이기도 한 조지서 역시 주살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유자광이나 흔히 갑자사화의 주역으로 왜곡되는 임사홍도 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죽을뻔하나 유자광은 이전의 공으로, 임사홍은 윤씨의 폐비를 반대했던 일로 풀려나게 됩니다. 실제로 연산 10년 4월 26일 사헌부에서 유자광과 임사홍이 이극균과 사귀었으니 그 죄가 참대시(즉시 참형에 처하지 아니하고 추분 이후 춘분 이전의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다만 3천 리 유형을 속바치고 그대로 일은 보게 하라고 전교하였습니다.
당시 시신은 부관참시, 쇄골표풍, 능지처참 후 시체를 백관이 모두 보게 하고 사방에 돌려 보이는 등 참혹한 형벌들이 연일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죄인의 집을 파 연못을 만들고 돌에 죄명을 새기게 하였습니다. 이 참화는 갑자년에 일어났으며, 뒤이어 언문학대까지 하게 되어 국문학 발달도 침체 상태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