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중종의 주도로 홍경주, 심정, 남곤, 김전, 중종 등이 조광조,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입니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습니다. 고형산, 심정, 남곤, 홍경주, 심정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으로 불리게 됩니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료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정광필, 남곤, 김전, 심정, 홍경주, 안당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습니다. 일설에는 이를 중종의 친위 쿠데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명 북문지화라고도 부릅니다.
원인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때 김종직의 제자들이 당했기 때문에 유학은 쇠퇴하고 기강도 문란해졌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중종반정 이후 무한대로 축재와 권력남용을 하던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의명분과 오륜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습니다.
이때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었습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의 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사람이었습니다. 1515년(중종 10년)에 성균관 유생 2백여 명이 연명하여 그를 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조판서 안당도 그를 추천하였으므로 곧장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5년간에 걸쳐 정계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삼대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종직이 출사한 이래 계속 중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사림파의 뜻과도 부합되었으므로 이들은 중종의 영입 노력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왕권 강화
중종 반정으로 공신이 된 유자광, 홍경주, 유순정, 성희안, 박원종 등은 권력을 장악하여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공신들의 권력 남용은 왕권을 넘보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왕권까지 우습게 보는 도를 넘어선 훈구파 공신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던 중종은 새로운 대안 세력을 모색하게 됩니다. 또한 중종 반정 이후 신료들 사이에 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상이 은연중에 조성되어 중종 등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습니다.
훈구 및 구 관료와의 갈등
사림파가 성리학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고려 이래 수 백 년간 장려하여 온 사장의 학을 배척하자 남곤·이행 등의 사장파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실을 돌보지 않고 주자학에 따라 종전의 제도를 급진적으로 혁파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속·습관까지 바꾸려 했기 때문에 정광필, 심정, 남곤 등 보수파의 훈구재상과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정광필, 안당 등은 사림파에 대단히 우호적이었고 사림파 발탁에 힘을 기울였지만 사림 인사들의 지나친 공세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사림으로 김종직의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남곤 역시 이들의 과격한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훈구 재상으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라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과 중상에 나섰습니다.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위에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 등의 혁신적인 정치를 후원하였으나 조광조의 정치가 혁신성을 잃고 도학적 언행만을 되풀이하자 점차 총애를 거두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1,2년 전부터 중종의 총애가 이미 조광조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조광조는 중종이라는 후원자가 없자 점차 정계에서 고립되고 있었습니다.
과정
불평이 많은 훈구파의 고형산, 김전, 홍경주 등과 심정, 남곤 등은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홍경주는 자신의 딸이 희빈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심정, 남곤 등은 경빈 박 씨 등과 친분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이들 후궁들에게 호소하여 조광조 타도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 씨 등은 나인들을 시켜 궁궐 안팎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서 벌레들이 파먹게 합니다. 희빈 등은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에 스스로 임금 될 꿈을 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묘하게 글자로 남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때 “走肖”는 “趙”(조)의 파자에 해당하며, 이는 은연중에 조광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북문으로 조정에 들어온 고관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남양군 홍경주와 예조판서 남곤, 공조판서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도총관 심정 등은 비밀리에 모의한 끝에 홍경주가 일당을 대표하여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임금 중종에게 밀고하였습니다.
마침내 중종은 대사헌 조광조와 우참찬 이자, 도승지 유인숙, 좌부승지 박세희, 우부승지 홍언필을 비롯하여 조광조파로 지목되는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심정, 김전, 홍경주 등은 당장 이들을 때려서 죽이려 하였으나 병조판서 이장곤과 좌의정 안당이 임금께 간절히 말렸고, 영의정 정광필은 “젊은 선비들이 현실을 모르고 옛날 제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실시하고자 한 것”이라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렸으나 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남곤은 유배나 파면 선에서 해결하면 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지만 역시 거절당합니다. 이후 이장곤과 안당은 이로 인하여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날 성균관의 유생 천여 명이 달려와서 광화문 밖에 모여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울며 호소하니 주모자 이약수 등 몇 명을 체포하자 모두 자진 포승을 지고 들어가 감옥은 가득 차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비밀회의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서훈을 내렸지만 남곤 등은 상훈을 거절하고 관직 사퇴를 청하기도 합니다.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귀양을 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김식과 기준, 김정, 한충 등은 귀양 갔다가 사형을 당하거나 자살을 하였습니다. 박훈, 박세희, 김구 등은 귀양을 갔는데 모두 30대의 청년이었습니다.
또 그들을 옹호하던 안당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와 김세필은 파면되었습니다.
뒤이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었고, 이유청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도 곧 폐지되었습니다. 이 옥사가 기묘년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라 하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후에 기묘명현이라 하였습니다.
한편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훈구파와 함께 조광조 일파의 숙청에 가담했던 남곤은 후배 사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간사한 인물로 매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