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설립된 대한제국의 협회입니다. 초기에는 사교 형식으로 출발하여 민중 계몽단체, 근대적인 정치단체 및 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897년에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1898년 12월 해산되었습니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그해 이어 7월 2일, 내부적으로는 민중 스스로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국을 표방,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참여자 수가 늘면서 각지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학생들에게 토론과 타협을 가르치는 협성회를 산하 기관으로 조직, 후원하였습니다.
고종의 환궁을 성사시켰고, 1896년 11월 지금의 서대문구 자리에 있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그 옆에 있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897년부터는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였습니다. 1898년 10월 한성부 종로 네거리에서 관민공동회를 조직하고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고종에게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898년 11월 정부의 외곽단체인 황국협회 등의 무고로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검거되어 투옥되었고,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천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했습니다. 고종은 칙령으로 양회 해산을 명령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민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던 서재필 등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 등이 참여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권, 민중의 정치 참여, 내정개혁 등을 주장하고 활동하였습니다.
설립 배경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이완용, 서재필, 박정양, 이상재, 윤치호, 안경수 등에 의해 결성, 조직되었습니다. 협회의 결성을 주도하던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방청 입장에 섰으며, 미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습니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습니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갑신정변 세력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11년 만에 귀국하게 됩니다. 서재필은 1894년 12월 정부의 사면령이 내려지고 1895년 박영효, 유길준 등의 권고로 귀국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간했습니다. 귀국 직후 서재필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며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우선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알아야 되므로 신문을 발간할 것을 주장하여 1년 만인 1896년에 독립신문을 발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발간 외에도 서재필은 말과 글, 국내외 사정을 안다고 해도 백성들 스스로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백성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는다, 자유와 권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조정과 관청을 향해 민중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을 역설했습니다. 이에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등은 적극 동조했습니다.
본래 개화파에 속하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윤치호 등이 주도했고 이완용, 박정양, 안경수 등 당시 정부 고위관료들도 참가했으며, 남궁억과 같은 지식인도 참여하였습니다. 1896년 2월 결성되었다가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김윤식의 건양협회를 흡수하여 규모를 키웠습니다.
서재필은 정부 관료들을 상대로 태종 때의 신문고나 세조 이후의 격쟁, 영조 이후 부활된 신문고의 사례를 예로 들며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할 기관이나 단체의 조직 또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또한 신문고는 아는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고, 지방과 산골의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음을 들어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독립협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지식인들과 사대부, 관료들의 사교클럽과 시사 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기타 사대부와 중인층, 지식인층까지 참여시켰고, 이후 본래 설립 목적인 민중 계몽을 위해 일반 백성들도 집회에 참여시켰습니다. 백정과 노비 등의 참여를 놓고 최초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의 적극 지지로 백정과 노비들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까지 서구 문물 수용과 내정개혁, 민중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였고, 열강의 주권 침탈에 저항하였으며 지배층의 중세적 인권유린의 상황 속에서 주권 독립운동, 민권운동, 자강운동, 내정개혁 등을 주장하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주요 설립자
독립협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람은 안경수, 서재필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위 개화파에 속하는 인물들로서 특히 미국이나 러시아에 가까운 입장이어서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라고 불리었습니다. 이들은 청국이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온건개화파의 반청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따라서 갑오개혁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밖에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이 적극 참여하여 협회를 지도하였습니다. 독립협회 강령은 충군애국과 국권회복, 자주독립, 민권쟁취이며, 백성의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의 참여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일본이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외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반대로 안경수 등이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조선에서 외세가 균형을 이룸으로써 국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여 계층
초기의 독립협회에는 개화파와 지식인층 외에 정부의 고관들도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나, 점차 일반 백성들의 참여도 확대시키면서 백성들도 지역 지회의 지도자로 이끌어 나가기도 했습니다. 한성부 종로에서 처음 출범된 이후 수원부와 양주군 등의 거점도시에서도 개최되고 이어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전국 18도에 독립협회의 지회가 조직되면서 협회는 전국적인 단체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방 지회에는 지식인과 유력계층 외에도 민간인 출신 지도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1896년 4월 출범 초기부터 회원자격에 대해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까지도 참여하였습니다.
사회 개혁, 계몽 운동
1897년 중반부터 협회는 한성부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 주관하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로써 토론과 웅변, 연설에 대한 것이 일반인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립신문과 협회의 활동을 위험요소로 여긴 척신과 황제파 대신들이 서재필을 공격하게 되면서 궁지에 몰렸고, 자객까지 침투하게 되자 결국 그는 떠나게 됩니다. 서재필은 1898년 5월 협회를 유길준, 이상재, 윤치호 등에게 인수하고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재필이 추방되자 협회는 윤치호, 이상재 등에 의해 지도되었습니다.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주로 청년층에 대한 토론 활동과 천부인권사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활동이 축소되었습니다. 이어 이상재 주도로 남궁억, 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미국으로 추방된 서재필은 본회원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들과 연락하며 뒤에서 협회를 지도 · 후원하였습니다. 이때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는 한편, 조선인 유학생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직접 배워오게 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프랑스인들에 의한 지하자원 개발과 철도 사업 개입을 비판했습니다.
협회는 외국 세력에 의한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 허용은 조선의 경제를 외세에 국가경제를 예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이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에게 이를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후 정부는 조선인 군대에서 교관과 조교로 훈련을 담당하던 일본인 군사고문관과 러시아인 군사고문관을 해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한러은행 등도 폐쇄시켰으며, 외국인에 의한 금광개발 허가 규정 또한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러 개방, 자유주의 운동
1897년 중반 독립협회는 러시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이완용 등 친러파는 대거 협회를 떠났습니다. 1898년 3월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을 격렬히 성토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누구나 참여해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토론의 장, 만민공동회는 조선 민중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독립협회를 이끈 사람들은 시장개방을 통해 상업을 진흥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공업과 농업을 발달시킨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박지원과 박제가, 오경석, 유대치, 박규수 등의 중상주의 사상의 영향을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를 이끌던 시기에는 러시아와 그 동맹국 프랑스가 조정을 장악하고 이권침탈이 심했기에 상대적으로 일본, 영국의 이권침탈 위험성은 낮게 보았습니다.
노비 해방 선언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합니다. 한편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습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됩니다. 이날 토론회의 주제인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 에 대단히 불가하다'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반대편은 토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에 자유롭게 토론하였습니다.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 편에 서서 발언하였습니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냈습니다.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참관자에 의하면 토론이 매우 진지 하였으며 토른 회의 결과 100명 이상의 노비들이 자발적으로 해방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습니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정부와의 갈등과 해체
1898년 10월 종로 네거리 광장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 '6개 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 하였습니다.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황제에게 건의하는 등 혁신운동을 전개하던 중 마침내 보수적인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처음에 시국 6개 조 개혁안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났으나 이행을 거부하였습니다. 협회에서는 정부 비판과 대신들 탄핵의 외침이 계속되었고 대신들이 탄핵되어 파면당하고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렀습니다.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통해 황국협회를 지지하는 천여 명의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한성에 불러들여 독립협회를 습격했습니다.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 수천 명은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습니다. 흥분한 민중은 정부 대신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김덕구라는 청년이 청파골에서 부상배에게 맞아 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독립협회에서는 일부러 대한문 앞에서 그의 장례식을 지내어 공동회의 군중으로 하여금 한층 더 기세를 올리는 행태까지 자행하였습니다. 이어 정부에서는 황국협회와의 충돌을 문제 삼아 1898년 독립협회의 해산을 건의하게 됩니다.
1898년 11월 민중들의 정부 대신 탄핵에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습니다. 황제는 칙령으로 양회의 해산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협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동년 11월 조정의 중신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라고 무고하였고, 정부의 외곽단체인 황국협회 역시 독립협회의 황제 폐위설과 공화정 수립설을 유포시킨 뒤 이를 근거로 남궁억, 이상재, 윤치호 등을 탄핵하여 독립협회를 와해시켰습니다.
12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습니다. 그 후 협회는 1년여간을 더 존속하다가 1899년 12월 해산되었습니다. 독립협회에서 개설한 만민공동회는 1900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그 후 독립협회에서 추진하려던 민권 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주장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로 계승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