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입니다. 사화가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 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입니다.
15세기 후반에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였는데 이에 훈구파는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훈구파는 성종실록 편찬에 원고가 된 사초(史草) 중에(史草)중에 《조의제문》의 불충함을 명분으로 하여 연산군의 지원에 힘입어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조의제문》은 지난 계유정난(1453) 때(1453) 있었던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에 격노한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초를 근거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였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견제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배경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숙부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따라서 1468년 조부 세조 사후에 숙부인 예종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죽었을 때,,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인 월산군을 뒤로하고 성종이 왕에 즉위하였는데, 이는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으로 계승서열을 뛰어넘은 즉위과정으로 인해 성종은 즉위 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좁아졌고 왕권도 약했졌습니다..
성종의 즉위 후 할머니 정희왕후가 7년 동안 섭정을 하였는데, 성종은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1476년 친정이 시작되자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대거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조가 만든 원상제(院相制) 역시 폐지해 버렸습니다. 원상제는 공신 원로들이 실질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왕은 형식적으로 결제만 하도록 한 제도로 왕의 실권 행사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유정란(1453년)계유정난(1453년) 이후 세조시대의 공신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각종 특권을 누리며 매관매직을 하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하였습니다. 주로 삼사에 기용된 사림파들이 공신들로 구성된 훈구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자 양측은 빈번하게 충돌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성종까지도 말년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의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국왕과도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사화 발생
성종실록 편찬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을 명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왕이 사망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선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때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로 실록청 당상관에 임명된 이극돈은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사초에 훈구파 대신들의 각종 부정과 비리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중에 사림파의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는 이극돈 자신에 관련된 비리 역시 들어있었습니다.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2. 사건의 발단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내용 삭제를 부탁했으나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그러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史草)는 실록편집이 끝나면 파기하여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사초를 유출하여 훈구파였던 유자광과 의논하였습니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과 악연이 많았습니다. 사림파 대간들은 유자광이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출세를 번번이 반대해 왔습니다.. 그리고 함양 학사루에 걸어 놓은 유자광의 시판을 김종직이 철거하며 자신을 무시한 사건으로 개인적인 감정도 품고 있었습니다.
유자광은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였습니다. 1498년 7월 1일, 이들은 연산군을 찾아가 김일손 등이 쓴 사초의 내용을 비밀리에 알렸습니다. 도승지 신수근이 사관의 참여를 막았기 때문에 사관이 배석하여 대화내용을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이 많았던 연산군은 내용을 보고받은 직후 사초를 왕에게 올리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고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3. 사초의 내용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가 술법으로 궁액을 움직이고, 세조의 총신이자 훈구파인 권람이 노산군의 후궁인 숙의 권 씨의 노비와 전답을 취한 일 등 세조대의 불교 중흥책과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한 글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 계유정난(1453) 때(1453)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고 황보인과 김종서는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라 기록하고 이개, 박팽년 등 절의파의 행적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세조가 인륜을 저버리고 며느리들을 탐했다고 의심할 만한 내용들도 있었습니다.
사초에는 기본적으로 세조의 업적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중에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김일손이가 사초에 실은 것을 발견하고 이를 크게 문제 삼았습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하여 그 속뜻을 주석으로 달아 연산군에게 올렸습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으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4. 사림파 숙청
청도에 내려가 있던 김일손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사건에 관련된 사림파들은 대거 투옥되었습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충하고 불순한 행위가 그의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습니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김굉필, 최부, 정여창, 표연말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습니다. 또한 이미 지난 1492년에 사망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도 하였습니다. 한편, 어세겸·유순·이극돈·윤효손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는 몰락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