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대리청정과 갈등
1750년(영조 26년) 혜경궁 홍 씨가 경복궁에서 이정을 출산하자 영조는 의소세손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얼마 뒤 원손에 임명하고, 바로 세손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손은 1752년 4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통명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751년 11월에는 장자 효장세자 사후 홀로 있던 효순현빈도 사망하였습니다. 싹싹했던 맏며느리가 일찍 과부가 된 것을 영조는 안타까워했는데 이 둘의 연이은 죽음으로 영조는 한동안 상심하였습니다.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손자 이산이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영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사도세자에게 시험 삼아 명을 내려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습니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의 처벌, 추탈을 요구했지만 세자는 거절하였습니다.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고해바쳤습니다.
영조가 약네를 맡고는 이런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아가고 맙니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자가 소론에 우호적이라는 점, 선의왕후전 궁인들에게 경종 독살설 등을 접하고 노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노론은 주목했습니다.
노론의 모함과 외척의 수시 보고 외에도 세자는 의대병과 정신질환 등을 앓고 있었고, 옷입는 문제로 궁녀들을 죽였으며 귀인 박 씨 빙애를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정성왕후 사후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와 그의 친정 역시 사도세자와 갈등하였습니다.
임오화변
1762년 음력 4월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로 평안도를 다녀옵니다. 의문의 평안도행에서 당시 만나고 온 인물은 소론 재상이며 조문명의 아들, 조현명의 조카인 조재호였습니다. 그리고 동궁 지하에 알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 것이 어느 궁인이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습니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이런 사실들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질책합니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세자가 평안도를 다녀왔을 무렵, 동궁에 세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영조는 동궁을 행차하려 했다가 주저했습니다. 그사이 사도세자는 말을 달려 수일 만에 다시 한성에 등장합니다.
1762년(영조 38년) 5월 13일, 생모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하여 세손을 보호하라며 세자의 비행을 고변합니다.
당시 세자를 폐하며 영조가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에는 생모 영빈 이 씨가 영조에게 고변한 내용이 나옵니다.
1762년(영조 38년) 7월 4일(윤 5월 13일) 결국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불러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쌀 담는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습니다. 그 뒤 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죽)과 물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습니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맙니다. 8일 뒤인 7월 12일(윤5월 21일) 아사한 사도 세자의 부음(죽음)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