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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조 (3)

by fdadfasdf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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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류의 실패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도세자는 경종비 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 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됩니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 씨와 후궁 숙의 문 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됩니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론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1749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는 노론과 숙의 문 씨에 의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영조는 후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후일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가 생존했을 당시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했습니다. 이는 보위를 이을 세자가 생존한 상태에서 세손까지 점지한 것으로 세종이 병약한 문종이 세자였을 때 단종을 세손으로 삼은 것과 더불어 무척 드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로 왕위세습 구도가 불분명할 때 세손책봉을 하며 이미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오랫동안 마음을 굳혔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조는 늙어서 분별력을 잃을지언정 권력을 놓지 않았습니다.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행 및 살인행각을 담은 기록을 삭제할 것으로 요구하였고 영조 승하 직전 승정원일기가 세초 되었습니다.

 

재위 후반

세손의 대리청정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손(정조)을 자신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은 맏며느리 효순현빈은 승통세자빈으로 봉하여 받들게 하였습니다. 또한 정조에게 즉위 후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양위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대리청정을 결심하게 됩니다. 1774(영조 50)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 때 홍인한 등 노론의 지도부가 승정원의 승지와 사관(史官)들을 가로막고 붓을 빼앗으면서까지 방해하였으나,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곧이어 병권을 움직일수 있는 감국권과 부절 승인권한 역시 세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한편 은언군과 은신군 등이 시장에서 송사에 휘말린 뒤 홍봉한이 이들의 뒤를 후원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손자 은언군과 은신군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게 됩니다. 은신군은 곧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고 은언군은 세손이 즉위한 뒤에 석방됩니다.

 

최후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76(영조 52),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후 경희궁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후기로 오면서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 수가 감소하게 되면서, 영조의 국상 당시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주도복, 이상호 등의 선비들을 특별히 상을 내려 포상하기도 했습니다.

재궁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 구리시)의 동구릉의 원릉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원릉 자리는 원래 그의 증조부인 효종이 안장되었다가 이장된 자리라서 여러 번 논란이 있었으나 그대로 현재의 원릉 자리에 안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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