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3.1 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7 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 · 동양척식주식회사 · 매일신보사 · 경찰서 · 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 · 군 수뇌 · 대만 총독 · 친일파 거물 · 밀정 · 반민족적 토호 · 열신입니다. 말하자면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선 것입니다.
주요 사건
· 1920년 9월 14일 :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습니다.
· 1920년 12월 27일 :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 1921년 9월 12일 :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습니다.
· 1922년 3월 28일 :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습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습니다.
· 1923년 1월 12일 : 김상옥이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 1924년 1월 5일 :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습니다.
· 1924년 6월 1일 :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습니다.
· 1924년 6월 :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배정자가 은퇴하게 된 사건)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 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하였습니다.
· 1924년 6월 7일 :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고, 대서관과 금정관에서 군자금을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 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습니다.
· 1926년 12월 28일 :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습니다.
· 1927년 8월 1일 : 의열단은 난창 폭동에 참여 이날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나중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열단이 와해되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습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습니다.
· 1928년 11월 10일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었습니다. (공산주의자 소비에트 그런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 1929년에 와서 비공산주의자 의열단원 중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반발하여 단원들이 이탈함에 따라 겨우 잔당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1929년 12월 2일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해체 성명서를 내고 스스로 해체하였습니다.
단원
창립을 함께 한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 이었습니다이낙준이었습니다.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 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습니다.
단원 중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김익상은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또 김익상은 이종암, 오성륜과 함께 상해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 시도하였습니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김지섭은 일본 동경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은 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습니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공약 10조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4.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
5. 의백(義伯 : 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7.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8. 죽지 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9.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 한다.
조선혁명선언
약산 김원봉 선생은 1923년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글로 써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신채호는 김원봉을 따라 상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 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습니다.
그들은 의열단 선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고 단원의 필독서로 지정하였습니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후에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독립투쟁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설득하였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습니다.
임시정부와의 관계
임시정부 초기에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거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폭탄을 규율 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점축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 내의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무장 투쟁을 '모험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김원봉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에 창조파를 소외시키기 위하여 의열단과 제휴하였습니다. 이후 의열단은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되었고,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을 배격하던 우파 계열의 김구도 의열단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이라는 같은 방법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