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사대부와 연대
눈부신 전공에 비해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이 부족했던 이성계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정치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능력을 인정해 모든 전쟁터마다 반드시 그를 데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정몽주는 이성계의 장자방이나 제갈량 같은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정몽주를 통해 뒷날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했으며, 개국 과정에서 모든 일을 함께 하였고 개혁과 개국의 이념을 제시했습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친분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또한 친명 세력이자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의 부패권문세족 세력들을 숙청할 때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대학연의
안변책
1383년 8월, 이성계는 동북면에 침입한 호발도에게 승리한 이후 우왕에게 변경을 편안하게 할 책(安邊之策)을 제시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이 개국 이전에 가졌던 정치적 견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 유명한 무장으로서 내용이 충실한 정책 건의를 한 사람은 이성계 이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단편적으로 건의한 바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풍부한 사실과 주요한 사회 문제를 문장화해서 제시했던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또한 내용 전반이 군사 문제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모순과 도탄에 빠진 민생으로 지목하여 이후 그가 신진사대부와 함께 체제 개혁을 추진한 것을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맹자>의 표현이 인용되어 있어 정몽주의 영향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동 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본래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
1388년 4월, 최영과 우왕은 이 기회에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둘째,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셋째,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원정하러 간 사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소지가 있는 것
넷째, 곧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
이것이 이른바 '4 불가론'입니다. 현대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성계의 반대를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성계 개인의 뜻이라기보다, 그와 정치적으로 결합한 신진 사대부들을 비롯한 여러 요동 출정 반대 세력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하륜은 요동 공격에 반대하여 최영이 양주로 유배하였고, 권근은 격문 작성을 거부하였으며, 이숭인은 최영의 측근들에게 공격받아 축출되는 등 조선 건국에 반대한 사대부들도 모두 우왕과 최영의 요동 공격에 반발하였습니다. 우왕과 최영이 반대하자 이성계는 전열 정비 이후 가을 제출정을 제안하였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습니다. 공요군은 병력 5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습니다.
5월에 고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했다고 합니다.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 직전 이성계, 심덕부, 이지란이 서로 의형제를 맺고 회군을 결의한 기록화인 장수군도가 새로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평양부터 위화도까지 19일의 진군 기간을 거쳤고,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한 반면, 정작 회군 때는 개성까지 9일밖에 걸리지 않은 점을 들어 장마와 군량 문제는 구실에 불과하고, 이성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철저한 계획적인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과의 두 차례의 혈전 끝에 개경을 점령했고, 이후 회군 장수들의 요구였던 최영의 딸인 영비 최 씨 폐위를 끝까지 거부한 우왕을 폐위하고, 이후 이색과 조민수 등 사전 옹호 세력에 의해 옹립된 9세의 창왕을 잠시 받들면서 개혁을 강행하였습니다. 1년 후 조준, 정몽주, 정도전, 심덕부 등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 우왕과 창왕이 왕 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조작된 논리를 이용해 창왕을 폐위했고 공양왕을 옹립한 이후 비로소 전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결합하여 이인임과 조민수를 필두로 하는 고려 권문세족과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 왕조가 개창의 단초를 이룬 사건입니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 급진 신진 사대부의 적극적인 도움과 회군에 찬동한 이색, 최영 심문에 참여한 정몽주, 최영과 우왕의 요동 공격에 반대하여 투옥되기까지 했던 하륜 등의 협조로 내부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조준과 정몽주가 고려 구 세력의 대표 최영을 심문하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와 사대부는 최영을 축출했고 이해 12월 개경으로 압송해 처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