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 형식으로 조선 개국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 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비로소 정식으로 폐위되고 이성계가 신하들의 계속된 추대와 간청으로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습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왕건이 개국한 지 475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하여 멸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습니다.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립니다.
포용 정책과 고려 구신들의 출사
태조는 개국 이후에 개국공신 52명에 이어 재위 2년부터 재위 6년까지 모두 22차례에 걸쳐 도합 1,400여명의 개국원종공신을 포상하였고 이는 새 왕조의 안정에 크게 공헌했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태조 즉위 교서에서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고 지목된 56명 중 사망한 8명을 제외한 48명 중 32명이 태조, 정종, 태종 대에 다시 출사 하였습니다.. 개국 이후 태조는 고려 구 신들을 원종공신으로 포상하거나 적절한 관직에 임명해 회유하였으며, 특히 권근, 하륜 등 이색 문하 온건개혁파는 새로운 왕조에 적응해 다양한 직임에서 각종 문물 정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
새 왕조를 연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48].[48]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고, 천도를 명령했습니다.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 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습니다.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습니다.
태조는 직접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정궁(正宮) 터로 하륜이 오늘날 신촌에 해당하는 무악을, 정도전이 오늘날 경복궁 터를 지정하였으며 정도전의 견해가 채택되었습니다. 태조는 종묘와 사직, 법궁을 비롯한 한성 도시 계획 전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습니다.
한양으로 천도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하여 한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습니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습니다.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하였습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제도 정비와 법전 편찬 등 국가 기틀 수립
태조는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 전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과 좌시중 조준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 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였습니다. 태조 대 정치는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국왕의 권력이 우위에 있으면서 재상들과 논의하여 정책을 시행하는 체제로서, 이는 고려 말 7~807~80여 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운영하던 도평의사사를 공신들 및 관료들의 합좌 기구로 정리하여, 의정부와 육조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정치 방식이었으며 태조의 왕권은 도평의사사에 직접 국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등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존 도평의사사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채로 국왕과의 정치적 의사 소통 및 권력을 독점한 내재추를 혁파했습니다. 그리고 동서대비원ㆍ혜민국 등 고려 시대에 있던 사회제도를 계승하였습니다.
사병 혁파와 왕자의 난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신덕왕후 소생 두 왕자 중 장남 이방번은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신의왕후 소생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불만이 컸습니다. 태조는 즉위 이후 군권분장정책에 따라 왕자들과 종친을 절제사로 임명하고 군권을 나눴는데, 태조는 정도전을 내세워 이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하여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공주의 남편 흥안군을 살해하였습니다.
퇴위
태조는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또 이미 실권도 모두 잃어,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