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출생과 세자 시절
연산군은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조선 성종의 장자이자 성종의 계비인 폐비 윤 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후궁이 많았던 부왕 성종과 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 삼아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 씨를 왕비(王妃)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축출하게 됩니다. 1483년(성종 14) 세자에 책봉되었고, 허침·조지서·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는 연산군 외에 제2계비인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성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세자 이융의 나이가 18세였으므로 대세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려서 생모인 폐비 윤 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습니다. 일설에는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 때 제헌왕후 윤 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며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성종은 특별히 허침, 서거정, 조지서, 정여창 등에게 세자인 연산군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스승들 중 허침은 연산군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반면, 조지서는 정해진 대로 가르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유학 배우기를 아니 좋아하여 그 누구든 배우라고 타이르려 하면 "이제 그런것은 잡기(雜技)이다"라며 되려 타이르려 하였습니다. 그는 보다 새로운 것을 원했고 그것은 유학자들의 세상이 아닌 독립적인 중앙집권국가였습니다. 이에 허침은 연산군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정해진 것이므로 배우라고 부드럽게 권했고 조지서는 '자꾸 제 말을 안 들으시면 상감마마께 고하겠습니다'라 하여 연산군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연산군이 벽에 '허침은 성인이고, 조지서는 소인배'라는 낙서를 하였으며 결국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이용하여 조지서를 처형했습니다.
즉위
아버지인 성종이 승하하고 왕세자의 자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즉위 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빈민을 돕고《국조보감》 등 여러 서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국조보감》,《동국명가집》등을 간행했고, 사창·상평창·진제창(賑濟倉)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역대제왕시문잡저》,《속국조보감》,《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수의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즉위 직후 그는 전남 장흥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외할머니 장흥부부인 신 씨(長興府夫人( 申氏)와 외숙 윤구를 석방합니다. 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 폐비 윤 씨를 왕후(王后)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폐비 윤 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는 선왕의 유지(성종의 유언)를 이유로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했습니다.
즉위 이후
정치 개혁
즉위 초반의 연산군은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비를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왜구의 약탈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비육사(備戎司,(備戎司, 비변사의 전신)를 설치하고 상설 회의 개최와 병기 개량 등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평안도와 함경도의 성곽 개보수와 변경에로의 사민(徙民)의 이주 독려와 면세, 부역 면제 정책 등 변방으로 이주를 장려했습니다. 또한 정여창, 허침 등 세자시절 스승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 초반에는 경연에 자주 참여하는 한편, 선대부터 간행되던 《국조보감 國朝寶鑑》, 《여지승람 輿地勝覽》등의 증보, 수정을 계속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무오사화
연산군은 즉위 후《성종실록》 편찬을 명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왕이 사망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선례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실록편찬의 자료인 사초(史草) 중(史草)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김일손은 물론 이에 관련된 많은 사림파를 잡아들여 국문하였습니다. 훈구파 고관들은 이 기회를 통해 전왕 성종대에 들어 중앙정치에 대거 진입한 사림파를 일망타진하고자 하였습니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습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이목·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고, 이종준·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박한주(朴漢柱)·임희재·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남곤·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유배 보냈으며, 강겸(姜謙)·표연말·홍한(洪澣)·정여창·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승조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역시 유배를 보냈습니다.
또한 김종직의 문인인 성희안, 유순정 역시 연좌하여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이들은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박원종의 쿠데타에 적극 동참하게 됩니다. 한편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尹孝孫)·김전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는 몰락하였고 견제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생모 추숭 시도와 좌절
즉위 초부터 그는 생모인 폐비 윤 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성균관과 양사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 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추숭 시도를 반대합니다. 강하게 반발하던 사림의 태도에 연산군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감정적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는 사림파 관료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경연과 사헌부를 축소하는 한편,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했습니다.
또한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시켰습니다. 또한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 등 한성부의 일부 사찰은 연회장과 마구간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에 본래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던 연산군의 성품을 본 이극돈, 임사홍 등 훈구파 재상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 확장 및 정쟁에 이용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