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년 음력 10월에 훈구파 내에서 궁중파와 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폐비 윤 씨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 씨)을)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자인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입니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 복위를 반대하였고, 임사홍 등 궁중 파는 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번 사림파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뒤,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 부중파 역시 숙청합니다.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은 부관참시 되었습니다.
또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은 정 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시켜 때려죽이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가 산야에 버리고 아무에게도 매장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두 왕자를 유배를 보냈다가 이듬해 죽였고, 정 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 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를 보냈습니다.
당시 연산군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도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 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쳤고(들이받았다고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하게 됩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또는 역월 지제(易月之制),(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삼년상 대신 2525 일상을 치름)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복수
중종실록을 살펴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철거민들이 발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실제로 연산군일기 제위 9년 11월 22일 자 기사에 승지들에게 명한 것을 살펴보면, 궁 100척 이내에 민가가 있으면 불가한 것이 조선의 국법인 바 왕이 이 민가들을 철거하라 명했습니다. 이때가 겨울인 것을 감안하여 민가를 철거당한 백성들에게 집터를 제공하고 큰집 중간집 작은집으로 등급을 나누어 무명 5050 필 3030 필 1515 필을 지급하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명을 내려 지금이 겨울임을 감안하여 봄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철거하라 하였습니다. 불법 민가를 철거하는데 소정의 보상급을 지급하고 장차 다시 집을 세울 터까지 제공하는 것은 폭군의 증거라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즉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9일 신료들이 처음으로 한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받는 듯하면서 존호를 받아들입니다.
한글 사용 탄압
1504년(연산군 10년) 7월에 그의 폐륜적인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한글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게 했고 이로 인해 '훈민정음 해례본''훈민정음해례본'등 많은 한글 관련 책들이 소실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글을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위반자는 '임금이 발행한 문서를 망가뜨린 죄를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부터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사용하는 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임금의 지시를 위반한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를 때리라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정안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같은해 12월 10일에는 병조 정랑 조계형에 명하여 한글로 역서를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1505년 9월 15일에는 궁인의 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의녀를 시켜 읽게 했습니다. 1506년 5월 29일에는 "한글을 아는 여자를 각원(各院)에서 두 사람씩 뽑아 들이라"라고" 전교했습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새로 뽑혀온 흥청과 운평들이 간혹 어전에서 쓰는 존칭을 모르는 수가 있으므로, 어전에서 쓰는 말을 한글로 번역해서 인쇄하여 배포하게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