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 행위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였습니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 씨는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20대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후 연산군이 박 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게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습니다. 그 뒤 박씨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 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 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치세 후반
연산군은 압반과 사헌부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물들어있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했고 또한 의정부의 정 4품 직인4 사인, 검상, 이조와 병조의 낭관들의 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가며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관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했습니다. 이로써 문인 관료들 사이에 경쟁을 하게 하였습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 그는 정무를 보좌할 때 영의정이나 삼정승이라고 해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하게 하였습니다. 문묘에서 공자에게 작헌례를 할 때 그의 생전의 직분은 신하였다며 제배만 하게 하였습니다.
폐위와 최후
폐위와 유배 생활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신수근, 임사홍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여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연산군은 폐위(廢位)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교동에 추방되었습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을 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정현왕후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하게 됩니다.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 뒤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연산군은 한성부 근처의 한 민가에 숨었습니다.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즉시 압송되어 폐위(廢位)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된 뒤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그는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배 직후 열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됩니다. 뒤이어 강화도 근처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지게 됩니다.
최후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을 모면했습니다. 함께 유배되었던 그의 왕자들도 사사, 처형당했습니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배생활중 그는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 씨가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망 후 민중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합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1세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