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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조 (1)

by fdadfasdf 202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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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724(영조 즉위년) 830,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습니다.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소론의 김일경 와 목호룡을 처형하였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영조는 자신의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경종 독살설',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노론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악성 루머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습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하였지만, 노론의 독주를 염려하여 소론의 일부를 중용하게 됩니다.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전부 역적으로 처형하자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을 묵살하였습니다. 그러다 1727(영조 3)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았습니다.

 

이인좌의 난

1728년 경종4), 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인좌, 이유익 등은 소론 내 강경파를 701(숙종 27) 이후 실각한 남인 내의 강경파를 포섭했습니다. 근기 지방의 남인이 반란에 호응하고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 등은 충청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들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습니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군을 투입해 난을 진압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예천과 영천, 안동지역 유생들과 대구의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좌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난군 세력이 영남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반란 진압 후 영조는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여 과거를 정거하고 금고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대구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웠다.

이후 과거와 출사를 금지당한 영남의 남인계 유생들은 정조 때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영남 의병의 행적과 선비들의 연명부를 적은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리게 됩니다. 영남 남인 중에는 이인좌의 난에 일부 호응하였지만 대구, 안동지역, 예천지역의 유생들은 이인좌 측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충청도 출신인 이인좌를 영남 도적이라 한 것이 원통하다며 상소를 올렸습니다. 영조는 남인도 상당수 가담했음을 이유로 이를 묵살하여 정조 때부터 영남의 남인들은 만인소를 올리게 됩니다.

 

인권과 경제정책

영조는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습니다. 그는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와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습니다. 배고픈 민중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민중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2 필에서 11 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균역법의 제정으로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또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왔는데, 그가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조 자신도 소식하고, 물자를 절약하는 등 검소하게 살아냄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또한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게 하였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여 이듬해 수어청에 총의 제작을 명하였고, ()을 설치하여 각 보진(堡鎭)의 토성(土城)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 힘을 썼습니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耆老科 : 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하였습니다.

 

학문진흥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습니다.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여 민중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무원록(無寃錄)·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어제여사서(御製女四書)·육전(六典)·소학훈의(小學訓義)·속오례의(續五禮儀)·속대전·누주통의(漏籌通義)·해동악장(海東樂章)·여지도서·동국문헌비고·숙묘보감(肅廟寶鑑)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爲將必覽)·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악학궤범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라고 합니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였고, 풍속·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문화·예술·산업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습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하였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제도권에서 한자말 발음 교정의 변화

세종의 동국정운이후로 300년이 지나고 1947년에 운서인 《화동정음통석운고》《화동정음통석 운고》를 간행하게 됩니다. 이 운서는 우리나라의 운서들 가운데에서 최초로 중국 한자음과 조선 한자음을 함께 표기한 운서입니다. 1951년엔 18세기 현실 한자음의 대표로 두기도 하는 운서인 삼운성휘를 간행합니다.

 

탕평책과 외척 견제

영조는 노론이 자신을 추대한 것을 잊지 않고, 신임옥사 관련자들, 노론 44 대신의 사면 복권과 그 후손, 관련자들을 등용합니다. 1748년 이인좌의 난에 연좌되었던 소론 강경파, 남인 강경파는 다시 영조를 자극하는 괘서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가짜 군주라고 조롱하는 답안지가 발견되어 1748, 1755년 소론 강경파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과 유배형을 내리게 됩니다.

선의왕후가 죽고 그의 거처에서 성장한 차남 사도세자가 소론에게 호의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노론은 이를 경계했고 노론 강경파는 이를 영조에게 고해바쳤습니다. 또한 외척세력 역시 사도세자의 비행과 실수, 일거수일투족을 영조에게 고해바쳤습니다. 노론 외척 중에는 혜경궁 홍 씨의 친정 일가들도 있었고, 혜경궁은 남편 사도세자의 실수와 비행을 자신의 친정에 알렸습니다.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는 성품이었고, 좋고 싫은 것이 명확해서 싫어하는 것은 끝까지 싫어하거나 배척했다고 합니다. 세자에게 정신질환과 의대증 등이 있다는 점과 세자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 노론 및 외척에 의해 보고되는 사안 등 다양한 이유로 세자를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세자 대리청정 시 소론을 전부 축출하라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에 사도세자는 소론이 전부 역적이 아니라며 거절 의사를 표시하였는데, 이때 소론을 보호하려 한 것에 대해 소론 일각에서는 세자에게 호의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노론을 중용했지만 탕평책을 써서 소론 대신 관료들을 적극 등용했습니다. 한편으로 노론 강경파와 외척을 견제하려 했고, 성리학의 원칙과 현실 적용, 노론 내에서도 벽파나 시파에 속하지 않고, 외척이나 즉위 공로자들과 거리를 둔 청명당파를 중용했습니다. 노론청명당파는 노론 강경파나 노론 탕평파, 다른 목적으로 노론이 진정한 군자의 정당이라는 확신 아래 소론과 남인을 추방 · 배척할 것, 외척 세력과는 다른 이유를 들어 적극 상소했습니다. 동시에 외척 세력을 공격하고, 노론 강경파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는 노론 탕평파 역시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거부하는 청명당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원칙론을 높이 평가하여 이들을 중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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