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습니다.
인조의 원병 요청과 전멸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답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습니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습니다.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멸당했습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군사는 검단산에서 그리고 충청감사 정대규가 데리고 온 군사는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들의 칼날 앞에 쓰러졌습니다.
원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심연은 8000명으로 근왕군을 편성했습니다.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에게 군사를 주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 쌍령에 이르렀을 때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습니다. 그 후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 시 방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그것은 임금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책을 면하기 위해 오는 척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근왕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기근과 굶주림
조선팔도에는 괴소문이 퍼졌습니다.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옹성 전술을 구사하는 조선군들에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단련된 팔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괴소문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소문을 확대하는 자들에게는 처벌을 공언하였습니다. 조선인 병사들의 후퇴에 당황해한 인조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조선인 병사 몇 명을 처벌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하였습니다.
남한산성 성안의 군사들은 추위에 얼었고 식량은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인조는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말을 잡아먹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습니다. 성안에 피신한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과 수종자들도 굶주렸고 기근으로 쓰러져 아사, 동사하는 일도 속출했습니다.
망월봉에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 홍이포의 커다란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습니다. 행궁에 머물던 백관들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바빴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홍이포는 현대의 미사일 이상으로 공포의 무기였습니다. 당황한 인조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치열했던 논쟁도 허무했습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옛 제도를 고수하고 의리를 지키자던 김상헌과 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변해야 된다는 최명길이 각을 세웠지만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척화와 주화 논쟁이 불붙었을 때 일찍이 결론을 도출했다면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인조에게는 그러한 덕망이 없었습니다.
항복과 인질
1636년(인조 14) 인조는 청나라 군대를 되돌아가게 하고자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왕자대군이나 왕자군 대신 영양군 이거의 손자 풍해군 이 잠의 차남 능봉수 이이(綾峯守 李人+爾)를 능봉군으로 봉하고 왕제라고 속여서 청나라에 보내고 화의를 체결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일부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능봉군을 가짜 왕자로 꾸미고, 형조판서 심집(沈諿)은 재상으로 속여서 심양에 보냈다가 어느 조선인이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여 결국 되돌아왔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퇴각을 중단하고 계속 조선 왕에게 항복을 권고했습니다.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습니다. 이후 인조는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하였습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쓰였습니다.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입니다. 청나라의 입장에선 비교적 관대한 항복 의식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하였습니다. 반합은 장례를 치를 때 염하는 의식에서 차용한 방법으로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괴기스럽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쓰이던 항복 의식입니다.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왜인, 유구인, 거란족,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습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 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