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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성종

by fdadfasdf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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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 기간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 현이 있었음에도, 그는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의 열성계서도, 왕통에서는 성종은 예종의 사자로 나타나고, 의경세자는 생부, 덕종 추존 이후에도 그의 생부로 표기됩니다.

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습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 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성종 7)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습니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문인들을 적극 등용한 것을 참작, 김종직의 문하생들을 새로 대거 등용하게 됩니다.

 

생부 의경세자 추존

 

성종은 작은 아버지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는데, 1475년인 을미년(乙未年)에 회간대왕(의경세자, 성종의 생부)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을 두고 조정에서 성종의 아버지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한 대신들은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게 된다면 왕실의 계통(대종)에서 아버지가 두 분인 것과 같고, 예경(禮經)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를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왕대비 윤씨가 나서 "의경세자는 명()을 받아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명을 받아 왕()이 되었으며, 또 원래는 대종(大宗)이고, 예종이 비록 명을 받아 왕이 되었더라도 먼저 신하의 예를 의경세자에게 하였거늘, 하물며 의경세자는 예종의 친형이니, 예종의 위에 둔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여?" 되물었습니다. 배맹달(裵孟達), 임수겸(林守謙), 홍경손(洪敬孫), 권윤(權綸)등의 대신들도 대왕대비 윤 씨의 의견에 동조하여 "의경세자는 세조조(世祖朝)에 있어서 이미 세자(世子)로 봉()하였으므로 안으로는 계승(繼承)한 바가 있고, 명나라 황제가 특히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으므로 위로도 주품(奏稟)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의경세자의 친자(親子)로서 대통을 계승하셨으니, 의경세자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거들었습니다. 이후 조정의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자 성종은 확고한 의지로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종묘에 올리라는 절차 준비 명을 예조에 내렸고 반대파 대신들의 상소가 잇따랐습니다. 결국 147619일에 의경세자(덕종)의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안치함으로써 성종이 예종의 법자가 아닌, 덕종(의경세자)의 친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을 확인하였습니다.

 

폐비 윤 씨 폐출과 사사

 

첫 왕비였던 공혜왕후가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자신의 후궁 가운데 숙의 윤 씨를 왕비로 간택하고, 왕비로 책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윤씨는 성종이 다른 후궁을 찾자 공공연히 질투심을 드러내고 독약인 비상이 발각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분노하여 윤 씨의 투기를 계속 지적하였고, 원로 훈신들은 윤씨를 계속 탄핵하였습니다. 1479년 윤씨는 왕비에서 폐출, 사저로 내쫓겼나 폐비 윤 씨가 되었습니다. 그 뒤 양사의 언관들이 폐비를 사사해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자 그는 원자의 생모임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양사의 거듭된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됩니다. 그 뒤 왕비 간택 건의가 있었으나 이를 뿌리치고 다른 후궁인 숙의 윤 씨를 왕비로 삼았는데 정현왕후로 중종의 생모가 됩니다.

 

친정과 사림파 등용

 

임사홍, 유자광 등의 권신들을 축출하는 한편,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종직 등 사림파를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후대 선조 시기 사림정치의 완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 나간 시기였습니다. 1474(성종 5)에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東文選)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간행했습니다.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맡은 홍문관을 설치하는 한편, 문신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골라 집에서 독서하게 하는 호당제도를 실시하는 등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또한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1479(성종 10)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성종 22) 허종(許琮)을 파견하여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이듬해에는 이계동(李季同)을 함길도 일대에 파견하여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습니다.

 

최후

 

성종은 동물을 좋아하였는데 궁궐 후원에 사슴과 강아지, 고양이 등을 데려다가 기르기도 했습니다. 성종은 1494년 가을부터 폐결핵과 천식 등의 폐병, 기허증, 서증(暑症, 일종의 더위 먹은 병), 두통 등으로 병석에 누웠고, 등창까지 생겼습니다.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배꼽 밑에 갑자기 종기가 생겼고 이게 급격하게 악화되었습니다. 승하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긴 했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1495년 양력 120(1494년 음력 1224)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폐결핵과 천식 등의 폐병 합병증과 두통, 기허증, 서증, 등창, 피부종기 등의 후유증으로 3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습니다. 능은 선릉(宣陵)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2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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