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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조 (5)

by fdadfasdf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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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귀의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악몽과 악몽으로 인한 불면증을 계기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시중에는 그의 아들 의경세자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은 것도, 현덕왕후의 원혼이 죽인 것이라는 낭설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오래 악몽에 시달렸고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의 불교 귀의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 개국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훈신 중 김수온(金守溫)의 형인 승려 신미(信眉, 본명은 김수성(金守省))를 왕사(王師)로 받들어 궁궐로 초빙했습니다. 유학자들은 연명상소와 사퇴를 선언했지만, 세조는 이를 묵살했습니다. 신미는 세종대왕 당시 세종대왕의 명으로 궁궐 내에 내원당(內願堂)의 건축과 법요(法要)를 주관했으며, 세종대왕의 명으로 복천사(福泉寺)의 중수를 맡아보았습니다. 문종 즉위 후에 신미는 선종의 지도자인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신미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의 중건에도 관여하였습니다.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습니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와 신륵사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수종사(水鍾寺)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습니다.

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경기도 양주 송촌리 용진의 운길산 수종사(水鍾寺)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 유가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합니다. 세조는 수종사를 다시 중건하고 대대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100 섬과 소금 5050 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200 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습니다.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 해인사의 영정은 1458728일 윤사로, 조석문 등을 해인사행향사(行香使)로(行香使) 임명해 해인사에 파견할 때, 윤사로와 조석문의 건의로 해인사의 무명 승려에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습니다.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습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습니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습니다.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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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을 앓던 그는 거듭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적인 망상도 심해졌습니다. 1467(세조 13) 5월에 함경도 회령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 백성의 지역감정 등에 편승하여 거병, 단종 폐위 등은 반역이라는 명분으로 거병했습니다. 그해 7월 조카 귀성군 준과 강순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812일 진압하게 됩니다. 이어 강순을 파견하여 함길도 너머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습니다. 그는 무장들을 신뢰하여 귀성군 준, 남이, 강순 등을 측근에 두었는데, 이들에 대한 세조의 총애에, 어떤 이유로 반감을 품은 왕세자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을 모두 숙청했습니다.

한편 훈구 공신들의 발호를 우려하던 그는 만년에 길재, 김숙자 등 정몽주의 문하생들과 김종직 등을 중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종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하게 됩니다.

말년에는 조카 단종을 내쫓다 못해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합니다.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일반적인 역창이나 종기 정도로 여겼지만 그의 병은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나병(癩病)이었습니다. 악몽과 불면증, 신경쇠약 등으로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음력 9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습니다. 바로 910일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黃中김계박(金繼朴) 등을 파견하여, 그해 1229일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습니다. 당시 나이 향년 52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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