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 간행 지원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활기를 띠고 서적의 보급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출판 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습니다. 〈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 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 經濟六典〉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밖에도 〈동국지도 東國地圖〉·〈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 〈오륜록 五倫錄〉·〈역학계몽도 해 易學啓蒙圖解〉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1461년(세조 7년)에는 자신의 친필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을 간행하였습니다. 주자소에서 세조의 친필과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을해자(乙亥字)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책으로,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과 조선 초기 활자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판본입니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후일 보물 제1520호로 지정됩니다. 불교 경전과 불교 관련 서적들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포, 확산되었으며, 훈민정음으로 된 책들 중에는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시중에 유통되었습니다.
말년
현덕왕후 저주 관련
1457년 음력 6월 갑자기 악몽을 꾸고 형수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폐서인 시켰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전설과 야사가 나왔고, 세조 사후 희극 작품의 소재의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야사는 1457년 아들 덕종(의경세자)이 일찍 죽자 세조가 아들 단종의 죽음에 한을 품은 문종비 현덕왕후의 혼령이 사주한 것이라 착각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음애 이자가 쓴 '음애일기(陰崖日記)'에 의하면 그냥 물가로 이장했다고만 전합니다. 음애일기에 의하면 '1457년의 어느 날 세조가 궁궐에서 낮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리자 소릉(현덕왕후릉)을 파헤치라고 명하였습니다. 사신이 석실(石室)을 부수고 관을 끌어내려하였으나, 무거워 들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괴상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니 그제야 관이 움직였습니다. 이를 평민의 예로 장사 지내고 물가에 옮겨 묻었다.'는 것입니다. 야사와 달리 의경세자가 사망한 것은 1457년 음력 9월 2일로, 오히려 단종(1457년 음력 10월 21일)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시중에는 현덕왕후의 저주로 의경세자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시중에 유포되었습니다.
또한 현덕왕후가 세조 시기인 1457년 음력 6월 26일에 서인(庶人)으로 격하되었지만, 그것 또한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처형당해 현덕왕후(1457년 음력 6월 26일 폐서인)가 아버지 권전(1456년(1456 음력 7월 7일 폐서인)과 함께 연좌된 것이었습니다. 폐서인 된 왕후의 능은 평민의 격에 맞도록 작게 재조성 되었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게 됩니다.
이후 중종 때부터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에 따라 1513년 음력 3월 12일에는 중종이 현덕왕후를, 1699년 음력 7월 15일에는 숙종이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선을 명예 회복시키게 됩니다.
문둥병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조가 나병에 걸리게 된 원인은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고 합니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 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습니다. 세조는 상원사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5만 명의 화공과 5만 명의 목수를 동원,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문수동자상을 조성해 상원사에 봉안했습니다. 문수동자상은 1466년(세조 12년) 나병이 일시적으로 낫자 이를 기념하여 제작, 봉안한 것입니다. 문수동자상은 1984년 10월 15일 국보 221호로 지정됩니다.
세조의 딸 의숙공주는 세조의 나병이 낫기를 기원한 기도문을 지어 문수동자전에 바쳤습니다. 의숙공주의 기원문은 1984년 7월 21일 평창군 상원사의 승려들 사리들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문수동자상 내에서 속적삼도 발견되었는데, 이 속적삼은 1991년 3월 학자들의 연구 결과 세조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