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과정
왕족, 훈신들의 위기의식
그는 보통의 왕자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병약했고, 후사(단종)도 나이가 어렸습니다. 세종 자신도 병중인 데다가,, 문종은 부왕보다도 더 병약하여 요절할 우려도 있었습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세종은 또, 자신이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 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452년(문종 2년) 4월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습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습니다.
1452년 문종은 병약하여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나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를 시행하자 불만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고 종친들은 저마다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분경(청탁 등의 목적으로 종친을 방문하는 일)을 금지하려 하자 수양대군 등이 강력항의 하여 김종서 등 신하들은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정변 기도와 권력 장악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종친과 사대부가 모두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이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이어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절재 김종서(섭정)·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겸한 뒤 스스로 영의정부사 겸 섭정이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 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 등관에 서훈하였습니다.
그 뒤 안평대군의 양가의 재산을 적몰 하고,, 성녕대군 부인 성씨 등을 폐출시킨 뒤 안평대군의 가족, 측근들을 노비로 삼았습니다. 이후 안평대군의 처형을 유도하여 탄핵, 그해 10월 19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한 뒤,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3월 말에는 스스로 중외 병마 도통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동생 금성대군과, 단종의 보호자로 세종의 후궁이며 단종을 양육했던 혜빈 양 씨 등이 그의 집권에 반발하였으나, 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 음력 6월에는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바로 혜빈 양 씨와 금성대군이 서로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한 뒤 가산을 몰수시키고 혜빈 양 씨는 충청도 청풍으로,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또한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된 후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게 됩니다. 한남군은 윤 6월6월 11일에 금산(錦山)에 유배 보냈다가 아산(牙山)에 이배 되었으며 세조 2년인 1456년 음력 6월 27일에는 함양(咸陽)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혜빈 양 씨를 교수형에 처하게 됩니다.
즉위 이후
즉위 초반
즉위 초 그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권을 추진하게 됩니다. 세조는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세종대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했습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습니다.
각지의 수령을 국왕이 직접 임명하되, 백성들에게 수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8도의 관찰사가 일부 작은 현의 현감, 현령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현령과 현감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것으로 바꾸게 됩니다. 또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삼정승과 좌찬성, 우찬성이 육조판서들의 정무를 결재하는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6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조참판인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이때 세조는 내가 나이가 어려 국정을 처리 못하겠는가 하며 하위지를 참형에 처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사관은 이 사건을 두고 정변후임을 알지 못하고 하위지가 어리석은 의견을 개진했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부름을 받아 예조 참판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 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를 않았다 합니다. 그러나 하위지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 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를 대신하여 육조가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다시금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습니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반대하고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유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하위지는 즉위 초 세조가 역대병요와 병서 편찬을 도운 사람들을 승진시키려 한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습니다. 역대병요와 병서의 책임자가 수양대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습니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습니다.
한명회를 시켜서 행정기관의 개편을 추진하고 향소부곡 제도를 폐지하게 됩니다. 한명회는 5가구를 1개의 통으로 묵는 오가작통법과 다시 5개의 통을 1개 리로 하고, 몇 개의 리를 면(面)으로 하는 면리제를 창안하여 세조에게 건의합니다. 오가작통법으로 세금의 납부가 수월해졌고 세금납부를 피하여 달아난 자들에게는 같은 통과 리에 사는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됩니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 유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