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후반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합니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습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습니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양녕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습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눈병이 나고, 질환에 시달려 병석에 누우면서도 책을 옆에 끼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명하여 충녕이 책을 못 보게 엄명을 내렸으나 충녕은 몰래 책을 숨겨놓고 병석에서도 책을 읽었습니다. 또한 병석에 누운 동생 성녕대군을 간호하는 모습이 태종에 눈에 들기도 했습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습니다. 6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 보냈습니다..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쳤습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고 밭은 타들어 갔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로 먹을 것을 대신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민심은 날로 더욱 흉흉해져 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 종일토록 앉아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도 기우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습니다.
퇴위와 죽음
심온 제거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습니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습니다. 그리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습니다. 1419년에는 둘째 형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습니다. 왕권을 물려준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등 외척세력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병조참판 강상인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 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심온을 영의정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심정, 박습, 이관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심온은 사사되었습니다. 이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인 세종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최후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 되어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으로 존숭되었습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습니다.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주 1]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