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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조 (1)

by fdadfasdf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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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

 

신경희의 옥사

 

1610(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 씨 한준 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인조보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1594(선조 27) 7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합니다. 한 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습니다.

1613(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습니다. 1615(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 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습니다.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습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반정 직전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정원군은 1619(광해군 11)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620(광해군 12) 무인 이서, 신경진, 김류와 그의 외척인 구굉, 구인후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을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습니다. 능양군은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며 정변을 모의하였고 서인과 남인계 인사들의 지지와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반정을 감행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평산부사 이귀·신경진 등이 거사를 계획한다 하여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동년 겨울에는 이귀·김자점 등이 유폐된 서궁(西宮, 인목왕후를 일컬음)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반정과 즉위

 

1623411(광해군 15년 음력 312)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12(음력 313)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습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습니다.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의 근거자료가 인조시대 때 작성된 광해군 실록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 시대에 작성한 인조실록이 그 근거이므로 인조가 자신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농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일기는 정초본과 중초본, 정초본은 역사적 사료 즉 사초이며 중초본은 사초를 엮어서 만든 완성본이기 때문에 그들이 광해군의 행적을 왜곡했더라면 당연히 사초를 남기지 않고 없애야 마땅하므로 광해군일기는 그만큼 신뢰성이 높습니다. 한편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는 광해군의 인목왕후 폐모론이었습니다. 반정 후 형식적으로 인목왕후를 복귀시킨 뒤 그녀의 교서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즉위 이후 그녀에 대한 예우는 소홀하였습니다.

 

재위기간 중

 

즉위 초기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 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습니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습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합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습니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습니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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