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 숙청과 이괄의 난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 등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습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 가던 인조는 전 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습니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습니다.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공신 세력의 과도한 세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독재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 세력을 중용하게 됩니다.
서인 세력 견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발언하였습니다. 서인 공신 세력의 이 같은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던 그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 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여 서인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반정 초기 왕족 출신 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계열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켜 이들을 통해 서인 공신 세력을 견제하게 됩니다.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성균관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합니다. 남인계 성균관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불교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서인의 이념이 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인조는 이이와 성혼의 의혹들을 언급하며 문묘 종사를 거절하였습니다. 이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여론은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정원군 추숭 여론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인계 성리학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과 송시열과 남인계 허목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인조는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은 이를 비판하다가 불이익을 받고 관직 임용이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정묘호란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는 다르게 친명정책을 펼쳐 청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러한 때에 1623년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후방 안정을 꾀하고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습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 임을(烏合)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습니다.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하였습니다.
정묘화약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에 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 등이 표류하였습니다. 인조는 친히 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이라는 이름을 내려 조선에 정착시켰습니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 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벨테브레이의 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와 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