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역사40 갑자사화 갑자사화 먼저, 요점만 얘기하자면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보복과 연산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연산군이 일으킨 대규모 숙청 사건입니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성종 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대부분 숙청당했습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중종 반정 직후 대부분 복권됩니다. · 배경과 원인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폐출되었다가 1482년에 사사되었습니다. 연산군이 공표한 갑자사화를 벌인이유는 이때 윤 씨의 폐비를 찬성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복수를 위해서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이를 두고 중종때 사관들은 임사홍이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의논하여 연산군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로 합의하고 임사홍이 폐비 윤 씨와 관련된 사실을 연산군에게 보고했다고.. 2024. 5. 7. 무오사화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입니다. 사화가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 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입니다. 15세기 후반에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였는데 이에 훈구파는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훈구파는 성종실록 편찬에 원고가 된 사초(史草) 중에(史草)중에 《조의제문》의 불충함을 명분으로 하여 연산군의 지원에 힘입어 사화를 일으켰습니다. 《조의제문》은 지난 계유정난(1453) 때(1453) 있었던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에 격노한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초를.. 2024. 5. 7. 명종 을사사화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로 나타나고,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히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습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 씨 소생의 세자 호(훗날의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인종이 경원대군에게 선위하고 경원대군이 12세의 나.. 2024. 3. 6. 인조 (4)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습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습니다.1624년에는 어영 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습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습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 2024. 3. 6. 이전 1 2 3 4 5 6 ··· 10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