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역사40 인조 (3) 병자호란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습니다. 인조의 원병 요청과 전멸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답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습니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습니다.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 2024. 3. 6. 인조 (2) 북인 숙청과 이괄의 난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 등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습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 가던 인조는 전 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습니다.인조는 .. 2024. 3. 6. 인조 (1) 청년기 신경희의 옥사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 씨 한준 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인조보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합니다. 한 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습니다.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습니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 2024. 3. 6. 성종 수렴청정 기간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 현이 있었음에도, 그는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의 열성계서도, 왕통에서는 성종은 예종의 사자로 나타나고, 의경세자는 생부, 덕종 추존 이후에도 그의 생부로 표기됩니다.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습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 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습니다.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 2024. 3. 6. 이전 1 2 3 4 5 6 7 ··· 10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