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역사40

정조 (4) 붕당정치와 탕평책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습니다. 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였습니다.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입니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실행한 반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 2024. 3. 5.
정조 (3) 장용영"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5 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기존의 55 군영은 외척을 비롯한 여러 권신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인사권 또한 사실상 임금에게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는 이를 일원화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창설의 목적과 규모가 서로 달라 이를 통합하기가 쉽지 않자 새롭게 군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정조는 《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습니다. 30 명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2024. 3. 5.
정조 (2) 왕권강화와 정치개혁 규장각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습니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學.. 2024. 3. 5.
정조 (1) 아동 정책정조는 아이들에 대한 정책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정조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심지어 엎드려 절까지 했다고 한다. 정유역변1777년(정조 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괴한이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였습니다.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홍술해, 홍상범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며, 홍계능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하였던 세력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을 뿐 모두 .. 2024. 3. 5.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