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역사40 영조 (3) 고류의 실패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도세자는 경종비 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 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됩니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 씨와 후궁 숙의 문 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됩니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 2024. 3. 5. 영조 (2) 세자의 대리청정과 갈등 1750년(영조 26년) 혜경궁 홍 씨가 경복궁에서 이정을 출산하자 영조는 의소세손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얼마 뒤 원손에 임명하고, 바로 세손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손은 1752년 4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통명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751년 11월에는 장자 효장세자 사후 홀로 있던 효순현빈도 사망하였습니다. 싹싹했던 맏며느리가 일찍 과부가 된 것을 영조는 안타까워했는데 이 둘의 연이은 죽음으로 영조는 한동안 상심하였습니다.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손자 이산이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영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사도세자에게 시험 삼아 명을 내려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습니다... 2024. 3. 5. 영조 (1) 영조1724년(영조 즉위년)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습니다.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소론의 김일경 와 목호룡을 처형하였습니다.즉위 직후부터 영조는 자신의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경종 독살설'과,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노론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악성 루머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습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하였지만, 노론의 독주를 염려하여 소론의 일부를 중용하게 됩니다.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전부 역적으로 처형하자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을 묵살하였습니다. 그러다 1727년(영조 3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 2024. 3. 4. 연산군 (3) 음란 행위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였습니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 씨는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20대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소.. 2024. 3. 4. 이전 1 ··· 5 6 7 8 9 10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