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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4)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습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습니다.1624년에는 어영 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습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습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 2024. 3. 6.
인조 (3) 병자호란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히 박살내고 복속시키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습니다. 인조의 원병 요청과 전멸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답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습니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습니다.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 2024. 3. 6.
인조 (2) 북인 숙청과 이괄의 난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 등 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습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 가던 인조는 전 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습니다.인조는 .. 2024. 3. 6.
인조 (1) 청년기 신경희의 옥사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청주 한 씨 한준 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인조보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합니다. 한 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습니다.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습니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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