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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2) 집권 과정 왕족, 훈신들의 위기의식 그는 보통의 왕자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병약했고, 후사(단종)도 나이가 어렸습니다. 세종 자신도 병중인 데다가,, 문종은 부왕보다도 더 병약하여 요절할 우려도 있었습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세종은 또, 자신이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 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습니다.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452년(문종 2년) 4월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습니다. .. 2024. 3. 6.
세조 (1) 정치 활동 정치활동 초기와 전제 개혁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습니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田制詳定所都提調)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한글)으로(한글)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명나라와 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습니다.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 2024. 3. 5.
태종 (3) 집권 후반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합니다.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습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습니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양녕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습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2024. 3. 5.
태종 (2) 제2차 왕자의 난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 보냈습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습니다.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습니다.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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