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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수렴청정 기간 예종에게 아들 제안대군 현이 있었음에도, 그는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의 열성계서도, 왕통에서는 성종은 예종의 사자로 나타나고, 의경세자는 생부, 덕종 추존 이후에도 그의 생부로 표기됩니다.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습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 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습니다.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 2024. 3. 6.
세조 (5) 불교에 귀의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악몽과 악몽으로 인한 불면증을 계기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시중에는 그의 아들 의경세자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은 것도, 현덕왕후의 원혼이 죽인 것이라는 낭설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오래 악몽에 시달렸고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의 불교 귀의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 개국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세.. 2024. 3. 6.
세조 (4) 서적 간행 지원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활기를 띠고 서적의 보급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출판 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습니다.또한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습니다. 〈국조보감 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 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 經濟六典〉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밖에도 〈동국지도 東國地圖〉·〈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 〈오륜록 五倫錄〉·〈.. 2024. 3. 6.
세조 (3) 두 번의 단종 복위 사건과 대숙청 1453년 10월 25일 함길도 종성에서 일어난 이징옥의 난이 발생했으나 부하들이 이징옥을 배신하는 내분으로 쉽게 토벌했습니다.1456년 2월 단종을 복위시킬 목적으로 성삼문 등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타진되었습니다.세조가 즉위한 이듬해 (1456년) (1456년)에 성삼문·박팽년·유성원·하위지·이개·김문기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유응부, 서우승 무인들은 연회 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3 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 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합니다. 1456년 6월 성삼문 등이 단종의 ..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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