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강화와 정치개혁
규장각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싸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습니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學)과 두 명의 직제학(直提學)을 두었는데, 제학에는 황경원, 이복원을 임명하였고 직제학으로는 홍국영과 유언호를 임명하였습니다. 네 사람 모두 시파로 정조의 정책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홍국영을 관여케 한 점으로 보아 규장각 설치가 처음부터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79년(정조 3년) 규장각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네 명이 검서(檢書)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서류(庶類)[주해 9] 신분이었고, 정조는 이들을 발탁한 이유로 “이덕무, 박제가 등은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들의 처지가 남과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능력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남인에 속한 채제공을 규장각 제학으로 임명하면서 남인을 중용하였습니다. 채제공은 이후 우의정에 임명되어(1788년, 정조 12년) 정조의 최측근이 됩니다. 창덕궁에 자리잡은 내각 외에 강화도에 규장각 외각을 설치하여 왕실의 책들을 보관하는 한편, 제학과 직제학 이외에 직각(直閣)과 대교(待敎)를 한 명씩 더 두어 모두 6명의 각신(閣臣)을 두었습니다. 각신들은 승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으며, 왕과 신하가 대화를 할 때 배석하여 대화를 기록하는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따라서 규장각은 기존의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에서 하던 역할을 겸하는 핵심적인 기관이 되었습니다.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규장각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초계는 본래 의정부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여 보고하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정조는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주해 10]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40세가 되면 실제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정조 재위기간 동안 초계문신이 된 사람은 모두 13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초계문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약용, 정약전 형제와 체재공의 아들인 채홍원이 있습니다. 정조는 초계문신이 배워야 할 학문의 강목을 규정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규장각에서는 《좌전》을 비롯한 여러 도서를 발간하여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규장각의 권한이 커지고 실제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등장하자 반대파의 반발 역시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1782년(정조 6년), 이택징은 상소를 올려 규장각의 각신은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이지 조정의 신하가 아니며 일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경비를 많이 쓴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외척이 발호하여 자신을 해치려 하였기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였고, 규장각에서 인재를 살펴 사대부를 가려뽑아 직책에 발탁하고 퇴폐한 문풍을 진착시 키기 위해 규장각을 운용한 것이니 결코 폐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이는 규장각의 설치가 근위세력 육성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한편, 규장각의 검서와 초계문신 가운데는 당대에 실학을 주장한 문인들로 북학파나 남인 실학자들이 많았지만, 정조는 이들의 문체나 사상에 공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로 지어진 글들을 잡스럽다고 비판하였고, 문체반정을 통해 옛 문체를 지키지 않은 글을 쓴 문인들에게 반성문(자송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제가는 자송문을 지어 올리라는 이덕무의 권유에 불만을 드러내었고, 당시 재야에 있었으나 박제가 등과 교류가 깊었던 박지원은 “견책을 당한 사람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을 수 없다”며 끝내 자송문을 쓰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진작시키고자 한 것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에 기반한 옛 사상의 부흥이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