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와 탕평책
정조는 영조 시대부터 이어져온 탕평책을 계속하여 이어갔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 정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탕평책은 원론적으로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이었습니다. 영조는 스스로를 군주이자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집권 후기 정조 역시 자신의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칭하였습니다.
탕평책의 실현에 있어서는 영조와 정조가 차이를 보입니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 등 붕당의 인물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타협책을 이끄는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실행한 반면, 정조는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르는 논쟁을 통해 정치를 펼치는 준론탕평(峻論蕩平)을 실행하였습니다. 정조는 명절(名節)과 의리(義理)를 앞세운 준론탕평을 앞세워 소론, 노론, 남인 등에서 준론파를 새롭게 영입하고 기존의 외척과 노론 벽파를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영조나 정조가 내세운 명리와는 달리 현실의 영조 시대에는 각색 당파가 탕평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재편된 형국이 되었고, 정조에 이르러서는 벽파와 싶아로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상의 측면에서도 정조의 준론탕평은 이미 시대적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자학의 의리론을 온존 시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탕평책은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운영을 하여 세력간 균형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으나,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은 좁아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포섭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운영은 결코 새로운 정치논리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차 보수화되었습니다. 결국 관료, 산림[주해 11], 외척 등이 정치적 논리없이 서울과 왕실을 중심으로 가문을 팽창시키는 데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조 사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군사부론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임금이자 아버지이자 스승인 군사부론을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라 즉위 후에도 경연을 열 때 경연관들과 재상들, 승지들의 학문 실력을 점검하고 정조 스스로 바로잡아주거나 사서육경 해석에 대한 의견을 놓고 학자, 경연관들과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세자 시절의 사부였던 김종수는 정조에게 통치자이자 임금이자 아버지가 될 것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이는 세자 당시 그가 평소 생각하던 생각과도 일치했습니다. 김종수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습니다.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또한 세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종수는 세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습니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김종수는 소론 벽파의 주도로 노론에서 당론으로 세자를 공격할 때, 홍국영 등 소수의 소론 당내 인사들과 함께 세자 보호에 앞장섰고 정조는 김종수를 신뢰하였습니다. 또한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정치의 근본을 의리로 규정한 정조는 김종수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극도로 혐오하면서도 노론의 청명당파벌은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하였습니다.
김종수는 특히 정조를 공격한 김귀주,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과 모두 친밀했으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는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군주의 안위를 생각하여, 친지라 해도 문제가 있는 자는 고변하여 제거하겠다는 김석주를 본받겠다고 공언한 바도 있습니다. 이러한 김종수의 소신은 노론 당내에서도 엄청난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